존경하는 아버지를 떠나보내시고 43일 만에 비석 제막식을 한다.
존경하는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시고 휴일을 맞이하여 가족들과 함께 비석 제막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석 제막식을 거창하게 많은 지인들과 친인척들을 모시고 성대하게 할려고 하였으나 추석 밑이고 또한 분위기도 어수선하고 해서 조촐하게 가족들과 상의를 하여 간단하게 비석 제막식을 하기도 하였다. 존경하시는 아버지가 평상시에도 인정이 너무나 많으시고 또한 자상하신 편이라서 자식들에게도 늘 존경하는 아버지로 불리었다. 그래서 저 세상으로 떠나보실 때는 마음이 아프고 자식 된 도리로서 슬픔을 감당하기란 어려웠지만 인간은 태어나서 한 번은 저 세상으로 가야 할 길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좋은 곳으로 떠나보내는 날은 평생동안 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아래 비문안의 내용이다.
여기 화왕산 精氣가 서려 있는 대지면 괴동마을 案山자락에 한때 주림 탈피와 나라發興을 위한 새마을 운동의 한先鋒에서 밤잠을 설쳐가며 노력하셨던 분이 고이 잠들고계시니 公의諱는 千慶이요 號는靜剛이요 姓은 成氏며 貫은 昌寧이니 始祖 고려 中尹公諱 人輔의 二十五세 손이며 고려충신 寶問閣 直提學 貞節公 諱 思齊의十 九세손이시다 高祖의 諱는 周烈이시며 曾祖의 諱는 珏鎬이시며 祖의 諱는 安永이시며 考의 諱는 樂殷이시며 妣는 昌寧張氏大 植의女이시다 公은 丁丑年(서기一九三七年)三월 二十八일 대지면 괴동에서 태어나시고 어려서부터 姿稟이 溫情하고 聰明勤實하여 앞이촉망되더니 창녕농업고등학교를 卒業한 후 서기 一九六九년도에 경남 지방공무원 제1회 採用試驗으로 임용되어 창녕군청 내무과로부터 공보실 식산과 농산과 등 각 과의 계장을 두루거쳐 서기一九九一년에는 사무관으로 昇進하여 창녕군의회 전문위원을 歷任하셨고 서기一九九三년부터는 五년간 城山面長으로 재임하시면서 경상남도에서 처음으로 山地사과단지 내 水源을 개발하여 전지역에 點滴式 스프링클러를 성공적으로 設置하는등 面政에 많은 功績을 남기시어 타의 龜鑑이된 功勞로 경상남도도지사, 농협중앙회장, 보건사회부장관, 내무부장관, 대통령 등의 표창을 받았으며 서기一九九八년退任에 즈음하여 성산면 官內 外 二十여개 기관단체에서 心血을 기울여 면정을 펼친,노고에 고마움을 표하는 感謝牌가 殺到하기도 하였다 退任 후에는 先祖의 산소가 각처에 散在하여 시대의 변천에 따라 자손들이 守護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世論에 따라 宗孫 耆駿 및 문학박사 麟出등과 상의하여 墓圓을 조성하고 산소를 이곳으로 모시고 또한 효자공 諱 柱鎬와 烈婦인 祖母 金寧金氏의 행적비를 세우는데도 정성을 다하셨으며 한편 향리의 벗들과 交遊하고 後輩敎導에 노력해오시다가 애석하게도 享年 八十세로 丙申年(서기二千十六년)六월 十九일 別世하시었다 配는 瑞興金氏로 寒暄堂 諱宏弼後 克植의 女이시다 膝下에 五남매를 두셨으니 장남0孝는 達城 0東順과 결혼하고 次男 0憲은 密陽 0貴子와 결혼하였으며 韓國道路公社 각 지역의 지사장을 歷任하였고 삼남 0宅은 晉州 0仁淑과 결혼하였으며 장녀 0淑은 陵城 0滋千에게 시집갔는데 0千은 창녕군의회 제四,五,六대 군의원에 當選되어 제六대 議長을 歷任하였고 차녀 0子는 慶州 0相乃에게 시집갔다 손자녀 0錫 0花 0錫 0花
0錫 0錫과 외손 자녀 0善美 0載本 0知硏 0承勳을 두셨다 公 은주민을 사랑하는 정신과 투철한 奉仕정신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저 한때 행정의 最一線에서 苦樂을 같이한 읍 면장 九八同友會員 일동이 뜻을모아 비를 세우고저 함에 公의 長婿郞이 비문을 청하기에 나 또한 동회원으로 평소 公을 존경하는터라 사양치 못하고 위와 같이 記述하고 銘하니 平生 공직 獻身奉仕 주민칭송 자자하고 墓園조성 孝烈竪碑 자손도리 다하셨네 溫良천성 자녀사랑 집안화목 이룩하고 明堂에 잠드시니 어찌 아니 永眠하리~~
西紀 二千十六年 九月 四日
安東 金浩鎰 謹撰
昌寧郡 邑 面長 九八同友會員一同 謹竪
경남 창녕 고향의 농촌 마을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선영에서 가족들과 아버지의 비석 제막식을 하기도 한다.
비석 제막식을 마치고 아버지의 산소에 잔을 올리기도 한다.
가족들과 아버지의 비석 제막식을 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지 43일만에 이곳의 선영에서 비석을 제작하여 그 위용을 과시하면서 비석 제막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석 제막식을 거창하게 많은 지인들과 친척들을 모시고 성대하게 할려고 하였으나 추석 밑이고 또한 분위기도 어수선하고 해서 조촐하게 가족들과 간단하게 비석 제막식을 하기도 하였다
좌측에 서있는 꼬끼오가 5남매의 장남이라서 책임감이 무겁다. ㅎㅎ
비석 제막식을 하면서 하얀 천에 가려져 있는 비석이 더디어 그 위용을 과시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3일 만에 고향의 선영에서 비석 제막식을 하면서 5남매의 가족들이 보람을 느끼면서
먼 훗날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한 컷을 담아보기도 한다.
하얀 천에 가려져 있는 비석이 서서히 그 위용을 드러내기도 한다.
비석의 4면 중 정면이다.
비석의 4면 중 측면이다.
비석의 4면 중 후면이다.
비석의 4면 중 측면의 마지막이다.
가족들이 비석 제막식을 마치고 비석을 둘러보면서 후면의 많은 글을 읽어보기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3일 만에 비석 제막식을 마치고 가족들과 기념으로 한 컷을 담아보기도 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아버지의 선영이 있는 저 뒤로는 고향의 정겨운 농촌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우측으로는 아버지의 산소가 있고
좌측으로는 조부모님의 산소가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농촌의 전형적인 풍경이 아름답기도 하다.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저 뒤로는 농촌의 황금 들판이 끝없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도 농촌을 사랑하고 언제나 시골풍경을 좋아하기도 한다.
가족들이 비석 제막식을 하면서 비석에 담긴 글을 읽기도 한다.
하지만 글을 읽어 내려가는 그 순간에는 코끝이 찡하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평생 자식사랑과 인정이 많으신 분이라서 더욱더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비석 제막식과 아버지의 산소에 잔을 드리고 가족들이 음복을 하기도 한다.
멀리서 바라본 아버지 산소 주변의 풍경이다.
아래의 산소는 윗대로 조상님들의 산소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바로 인근에 위치하고 있기도 하다.
우측의 비석이 꼬끼오의 증조할머니의 비석이다.
열부로서 효성이 지극하셔서 그 공으로 6년 전에 비석을 세우기도 하였다.
윗대 조상님의 산소가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기도 하다.
윗대 조상님의 흩어진 산소를 이곳으로 한군데로 모으면서 깔끔하게 평장을 하여 가족 묘원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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