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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여행 갤러리 ♣/충청도

아산시 현충사 1

 충청 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있는 사당 이름. 임진왜란 때 활약한 장군 이순신(李舜臣)을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에 건립하고, 그 이듬해 ‘현충’이라 사액(賜額)함.

 

개요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종전 때인 1598년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사(戰死)하게 되면서 충무공의 호국 정신 및 애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유생(儒生)들이 조선 조정에 건의를 하게 되면서 조선 숙종 32년(1706)에 숙종의 어명하에 지금의 자리에 창건하고 이순신·이완·이봉상 3위를 모셨다.

수난 및 태동기

그러나 1863년 흥선대원군이 어린 고종을 대신해 국왕 섭정을 하면서 전국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한때 존폐위기에 처하기도 하였고 이에 유생들이 충무공의 업적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결국 흥선대원군의 명령에 따라 폐지되었다.

1910년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총독부의 압박으로 또 한 번 존폐위기와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고 여기에 일본인이 충무공 묘소 및 현충사를 위탁 관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932년 동아일보사의 주관으로 열렸던 현충사 복원 모금운동 때 모은 성금으로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하여 충무공의 영정을 모셨다.

해방 이후인 1963년에는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현충사의 구역을 확장하고 숙종 때 세웠다는 옛 본전을 대신하여 새로운 본전을 신축함에 따라 충무공의 영정을 옮기기도 했다.

특징

충무공의 애국 충렬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사당에는 장검 2자루와 옥로(玉鷺) 1구(具), '난중일기(亂中日記)' 등 유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이 일대를 성역(聖域)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관리 및 운영

현재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관리소가 운영하고 있으며 유료입장을 받고 있다. 매주 화요일은 휴관한다.

시설

본전(本殿)

1967년에 신축된 본전으로 전통 한옥으로 만들어진 곳이며 충무공 영정이 모셔져 있다. 참고로 본전에 내걸린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옛 본전

1706년에 만들어진 옛 본전으로 현재의 본전과는 달리 역사적으로 오래된 건물이며 숙종이 직접 하사했다는 현판이 그대로 내걸려있다. 1967년 지금의 본전이 신축되면서 현재는 전시보존상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고택(古宅)

충무공이 젊었던 시절 때 살았던 집으로 원래는 충무공의 처(妻)가 살던 곳이었다. 현재는 전시보존상으로 존치해 있으며 우물가인 충무정(忠武井)이 있다.

연못

현충사 경내에 있는 인공 연못으로 현충사 구역 확장 때 조성된 곳이다.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2011년 4월 28일 충무공탄신일을 기념하여 개관하게 된 곳으로 충무공의 업적과 당시 사용했던 유물들을 전시하는 곳이다.

 

 

 

 현충문 입구

 

 

 

 

 

 

 

 

 

 현충사 본전 들어가는 입구의 전경

들어가는 입구에는 울창한 고목의 소나무가 아름다웠다

 

 

 

 

 

현충사 본전의 전경

 

 

 

 

충무공 이순신장군은 1545년 4월 28일 서울 건천동(현 인현동)에서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변씨(卞氏)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은 어린시절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는 이곳 아산으로 이주하여 성장하고 혼인하였으며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함은 물론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76년 32세가 되던 해에 식년무과(式年武科)에 급제하여 함경도 변방의 동구비보 권관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 발포 만호,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 사복시 주부, 조산보 만호, 선전관, 정읍 현감 등을 차례로 역임하다가 1591년 2월 서애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발탁되어 전라좌수영(여수)에 부임하자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군사조련, 무기제조, 진지보수 등에 힘썼으며, 특히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건조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 20여만은 일사천리로 북상하여 5월 2일에는 서울이 함락되는 등 파죽지세로 우리나라를 짓밟았다. 그러나 공은 5월초 1차 출동때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40여척을 격파하여 승리한데 이어 5월말부터 6월초에 이르는 2차 출동때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에서

승리하였고 7월에는 평양까지 진출한 육군부대와 서해를 통해 연결하려는 적 함대를 한산도에서 기습 대파하여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바꾸는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연이은 안골포해전과 9월초 부산해전 등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1593년 웅천 등의 적 수군을 궤멸하여 남해안의 적을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을 삼았으며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1594년 당항포, 장문포 등에서 왜적을 소탕한 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보호, 산업장려에 힘썼다.

1597년 왜(倭) 간첩 요시라의 간계로 모함을 받아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받게 되었으나 정탁(鄭琢)의 상소로 사면되어 권율장군 휘하에 백의종군하였다가 정유재란때 원균이 참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되어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랑해전에서 133척의 적함과 대결, 31척을 부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1598년 적선 500여척이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陣璘)의 수군과 연합, 적군을 기습하여 접전중 12월 16일 새벽 적탄에 맞아 54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었다.

공은 전 생애를 통하여 일관된 애국심과 충성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 지극한 효성심을 고루 갖춘 인격자이었으며 특히 전략에 뛰어난 용장으로서 임진왜란중 싸움마다 승리했고 적 수군의 기세를 꺾어 제해권을 장악하여 곡창지대 전라도를 방어함으로써 군량미 확보에 만전을 기하는 등 어려운 여건에서도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으며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시조(時調)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공의 묘소는 아산 음봉삼거리 어라산(현충사에서 9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정조대왕의 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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