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의 향기가 가득한 세계적인 문화유산 안동 하회마을
봄이 오는 길목에서 영상의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는 한가로운 불금의 날에
아내와 둘이서 전통문화의 향기가 가득한 세계적인 문화유산 안동 하회마을을 둘러보면서 60년대의 구시대에서나 볼 수가 있는 초가집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하회마을에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유교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손꼽히는 하회마을은 가장
한국적이며 독창적인 문화를 간직한 씨족마을이기도 하다. 또 하회마을은 자연에 순응하며 서로 교감하고자 한 우리 민족의 자연관을 바탕
으로 상호이해와 소통을 통해 흐트러짐 없는 건전한 공동체적 삶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안동 하회마을로 오세요
안동 하회마을 입구에서 인증샷으로 한 컷을 담아본다.
유네스코에서 전 세계 인류가 지켜가야 할 보편적 가치로 인정한 하회마을의 진정성과 완전성을 이해하고, 살아 있는 유산적 가치를 함께
공유하며, 하회마을을 통해 전통문화의 향기를 체험할 수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 안동 하회마을이다.
안동시의 관광 안내도다.
하회마을의 관람 요금표다.
안동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와가(瓦家:기와집)와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 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연화부수형
·행주형에 일컬어지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와가(기와집)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생활문화와 고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하회마을의 안내도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이곳의 하회장터 입구로 들어서기도 한다.
하회장터에는 입구부터 초가집으로 농촌의 정겨움을 물씬 풍기게도 한다.
하회장터의 일부 전경이다.
하회장터에는 특히 안동의 찜닭과 간고등어 식당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기도 하다.
농촌의 정겨움이 묻어나는 하회장터의 초가집에서 막걸리에 파전으로 먹어보면 좋을 것이다.
하회장터에는 많은 식당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져있기도 하다.
하회장터의 일부 전경이다.
하회세계 탈 박물관에서 탈의 다양한 모습을 관람할 수가 있기도 하다.
하회 탈 박물관의 전경이다.
하회 탈 박물관의 전경이다.
하회장터를 지나고 셔틀버스를 타고 약 5분만에 하회마을의 입구에 도착을 하기도 한다.
하회마을의 세계유산 등재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생활공간이며,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Living Heritage)으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한국인들의 삶 자체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전서공 비각과 묘다.
전서공은 풍산류씨 제7세로서, 조선조 초에 가선대부 공조전서의 벼슬을 잠시 하다가 고향인
풍산에서 은거 중 그 곳이 자손만대가 살아갈 삶터로 적합하지 않으므로 명당을 찾다가 이곳 하회를 발견하고 관찰한 끝에 허씨와 안씨의
삶터를 피하여 숲과 늪을 개척하여 자손의 삶터를 마련하였으므로 그 은덕을 기려서 자손들이 세운 비(碑)이다. 묘소는 원래 풍산에 있었으나
중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인하여 화산중턱의 하회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모셔졌다고 한다.
하회마을의 전경이다.
하회마을은 현재에도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마을이다.
한말까지 35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150여 호가 살아가고 있다. 마을 내에는 총 127가옥이 있으며 437개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127개
가옥 중 12개 가옥이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하회마을의 풍산류씨의 세거 이전에는 허씨(許氏)와 안씨(安氏)가 먼저 세거하였다고 한다.
하회마을에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란 말이 전래되고 있으며, 하회탈의 제작자가「허도령」이었다는 구전(口傳) 및 강 건너
광덕동의 건짓골에 허정승(許政丞)의 묘가 있어 지금도 해마다 류씨들이 벌초를 하고 있다. 숭정(崇禎)15년(1642)의 동원록(洞員錄)에는
류씨 이외에도 극히 적은 가구의 허씨와 안씨(安氏)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파란 하늘에 초가집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하회마을의 골목길은 고즈넉한 시골풍경의 그대로를 연출하기도 한다.
하회마을의 민박집이기도 하다.
이곳의 초가잡 민박집에서 며칠동안이나 쉬었다가 가면 농촌의 체험을 그대로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파란 하늘에 앙상한 나뭇가지와 돌담길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기도 한다.
길게 늘어진 돌담길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하회마을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서 마을의 전체가 깔끔하게 단장이 되어있기도 하다.
전형적인 시골의 골목길을 연상하기도 한다.
아래의 양진당은 보물 제306호이기도 하다.
양진당의 전경이다.
우뚝 솟은 솟을대문과 장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양진당(養眞堂)」은 풍산 류(柳)씨의 대종가(大宗家)이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현판은 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1573)선생의 부친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1515~1573) 선생을 지칭한다.
당호인「양진당(養眞堂)」은 겸암 선생의 6대 자손인 류영(柳泳, 1687~1761)공의 아호(雅號)에서 유래하였다. 입암(立巖) 류중영 선생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 부르며, 양진당(養眞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랑채는 고려 건축양식이며, 안채는 조선 건축양식으로서
고려양식과 공존하는 고택이다.
양진당은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入鄕祖)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 공(公)이 13세기 입향 당시에 처음 자리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 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여, 고려말 건축양식과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正南向)의 집이며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아래의 충효당은 보물 제414호이기도 하다.
충효당은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서애종택’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 생존시의 집은 아니다.
서애는 현재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냈다. 선생이 30여년 몸담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했을 당시의 집은
극히 단출했다고 한다. 선생은 64세 때인 1605년 9월에 하회마을이 수해를 당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1607년
5월 6일 삼간초옥 농환재에서 타계했다고 한다.
달봉이네 찻집이다.
아래의 작천고택은 중요민속자료 제 87호이기도 하다.
작천고택은 중요민속자료 제87호다.
현재 집주인 이름을 딴 '류시주 가옥'이라고도 하나, 원래는 작천(鵲泉) 류도관공의 호를 따
「작천고택(鵲泉古宅)」이라 불려왔다. 건축수법과 양식으로 미루어 조선중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지금은 일(一)자형 안채만
남아 있는데, 갑술년(1934) 대홍수로 1채가 유실되었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이며, 사랑방에서 안방으로 이어지는
앞마당에 작은 토담을 두어 사랑손님과 안채의 부녀자가 마주치지 않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파란 하늘에 초가잡의 풍경이 아름답기만 하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기도 하다.
하회마을의 일부 전경이다.
초가집이 옛날의 60년대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한그루의 고목나무도 차디찬 겨울에 외오이 떨고 있기도 하다.
장독대와 초가집의 풍경이 농촌의 전형적인 풍경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 마송정은 천연기념물 제473호이기도 하다.
2006년 11월 27일 천연기념물 제473호로 지정되었다.
안동 하회마을(중요민속마을 122호) 북서쪽 강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있는 소나무숲이다.
조선 선조 때 서애(西厓) 류성룡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용(1539~1601)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 한다. 1983년에 세운 만송정비(萬松亭碑)에는
이 솔숲의 내력과 함께, 현재의 숲이 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숲에는 수령 90~150년 된 소나무 100여 그루와 마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심는 작은 소나무들이 함께 자란다.
이 소나무들의 크기는 나무높이 16~18m·가슴높이 줄기지름 30~70㎝ 정도이다. 이 숲은 여름에는 홍수 때 수해를 막아주고 겨울에는 세찬
북서풍을 막아주며, 마을사람들의 휴식공간 혹은 문화공간으로 활용된다. 보호면적은 47만 6,430㎡이다.
만송정에는 노송의 소나무가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달방에는 다양한 민속품이 판매되기도 한다.
부용대의 전경이다.
높이가 70m 이상인 부용대 단애의 정상에서 그 밑을 흐르는 화천(花川:화산에서 이름을 딴 낙동강의 별칭)과
백사장(白沙場)을 가로질러 만송정(萬松亭)의 송림(松林)까지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부용대 암석의 모습이다.
솔밭쉼터에서 따끈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쉬었다가 가세염
하회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바튀 둘러보고 부용대를 지나서 마음껏 걸어보기도 한다.
멀리서 바라본 부용대의 풍경이다.
부용대로 가는 나룻배 타는 곳이기도 하다.
저 뒤로는 옥연정사가 있기도 하다.
이 정사는 서애 선생이 노후에 한가로이 지내면서 학문을 하기 위해 세우려 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짓지 못했다.
그러던 중 승려 탄홍(誕弘)이 스스로 10년이나 시주를 모아 선조19년(1586)에 완성한 우정의 산물로 선생의 덕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이다. 처음에는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 했는데, 옥연(玉淵)은 정사 바로 앞에 흐르는 깊은 못의 색조가 마치 옥과 같이 맑고도
맑아서 서애 선생이 이름하였다. 선생은 이 집에서 임진왜란의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을 구상하고 저술하였다.
봄에 벚꽃이 만개를 하면 이 아름다운 길을 걸어보면 좋을 것이다.
이곳은 사진찍기 좋은 경관명소이기도 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일컬어지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의 입장료와 입장시간 안내다.
하회마을로 오는 길의 정보다.
안동하회마을을 구경하고 안동 구시장에서 안동의 명물 찜닭을 맛 나게 먹어본다. ㅎㅎ
안동의 명물 안동찜닭이다. ㅋㅋ
방가방가요 ^**^ 방문을 환영합니다.
가실 때는 아래의 ♥(공감) 버튼을 한 번 꾹 눌러주시면 복 받으실 것입니다. ㅎㅎ
아울러 더 많은 분들이 이 글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 국내여행 갤러리 ♣ > 대구,경상북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구시 달서구} 도원지의 주변을 따라서 낭만적인 길을 걸어볼 수가 있는 월광수변공원 (0) | 2017.03.23 |
---|---|
{대구시} 앞산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대구시가지의 아름다운 풍경 (0) | 2017.03.17 |
{대구시} 대구의 수목원에서부터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0) | 2017.02.13 |
{경북 경산시} 정초에 한가지의 소원을 들어주는 팔공산 갓바위에 소원 빌로 가요 (0) | 2017.01.31 |
{대구시 동구} 정유년 새해에 한가지의 소원을 들어주는 팔공산 갓바위에 소원을 빌로 간다. (0) | 2017.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