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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여행 갤러리 ♣/전라도

{전남 순천} 초가집이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낙안읍성 민속마을

초가집이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낙안읍성 민속마을


생태습지의 천국 순천만으로 갔다가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낙안읍성의 민속마을을 가보기도 한다.

순천시 낙안면에 소재한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넓은 평야지에 축조된 성곽으로 성내에는 관아와 100여 채의 초가집과 돌담과 싸리문에

가려 소담스레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도 하다. 옛 고을의 기능과 전통적인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는 서민들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에도 눈으로 보고 느낄 수가 있는 전통문화로서, 낙안읍성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기도 할 것이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면서 옛날 어릴 적에 내가 살던 고향이 생각나기도 한다.

잘 보존된 토속적인 분위기와 민속 경관을 누구라도 한껏 느낄 수 있다. 비록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심의 고장은 아니지만

마음속의 고향으로 포근하게 다가옴을 느끼게 되는 것은 역시 초가집과 함께 꼬불꼬불 미로 같은 돌담길과 싸리 울타리가 둘러 처진 텃밭

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남부지방 독특한 주거양식인 툇마루와 부엌, 토방, 지붕,섬돌위의 장독과 이웃과 이웃을 잇는 돌담은 모나지도 높지도 않고

담장이와 어우러져 술래잡기 하며 뛰놀던 어린시절 마음의 고향을 연상하게도 할 것이다.





낙안읍성의 민속마을 입구로 들어선다.







낙안읍성의 입구에서 친구와 둘이서 한 컷을 담아보기도 한다.

이 낙안읍성은 대개의 성곽이 산이나 해안에 축조되었는데 반해, 들 가운데 축조된 야성(野城)으로 외탁(外托)과 내탁(內托)의 양면이

석축으로 쌓여 있는 협축(夾築)으로 이루어졌다는 큰 특징이 있다. 이곳 낙안 평야지에 있는 읍성으로서 연대를 살펴보면 조선 태조 6년

(1397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襄惠公)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하였다. 그 후 인조 4년

(1626년 5월 ∼ 1628년 3월) 낙안 군수로 부임한  충민공(忠愍公)임경업(林慶業) 군수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 의하면 세종6년(1423)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 내용에 "낙안읍성이 토성으로 되어 있어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읍민을 구제하고 군을 지키기 어려우니 석성으로 증축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승낙하여 세종9년(1426)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

시작하였다고 하는 이설이 있다고 한다.







낙안읍성에 대한 설명의 글이다.

상기의 글을 상세하게 읽어보면 그 내용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낙안읍성의 안내도다.






순천에는 생태습지의 천국 순천만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순천에는 승보종찰 송광사가 자리 잡고 있다.






순천에는 천년고찰 선암사가 자리 잡고 있다.






드라마촬영 세트장이 있다.







순천에는 원시사회 만남 고인돌공원이 있기도 하다.






낙안읍성의 가야금 병창 계보도가 있기도 하다.






낙안읍성 동문 입구와 남문과 서문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편에 장승(벅수)과, 솟대(짐대)가 세워져 있고 매년 정월이면

훼손된 장승을 새로이 세우고 장승제를 지내 왔다. 예전엔 길 양편에 장승(벅수)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으며 이곳을 장승(長丞, 장생)

거리 또는 벅수거리 라고 하였다 한다. 지금은 옛것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장승과 솟대를 세웠다.

장승은 길 양편에 세워졌는데 오른쪽은 남 장승으로 천하 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 하고 왼쪽에 있는 장승은 여 장승으로 지하 여장

(地下女將軍)이라고 한다. 원래는 신라 소지왕때 옛길을 넓혀 관도(國道)를 사방으로 넓혀 닦고 우역(郵驛)을 두어 사람과 물품을 보내기

위해 10리마다 흙이나 돌무더기 또는 기둥을 세워 표시하였는데 이때 나무 기둥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 두었던 것이 장승(長丞)이라 하였다.

한편으로 사찰이 황폐되어 가자 사찰(절) 입구에 세워 절을 수호하는 보살 법수(法守)로 불리게 되었고 또한 이 법수보살이 절을 수호하듯이

 마을을 수호하여 주기를 바라는 신앙심에서 마을 어귀에 법수를 세우고 마을의 각종 재앙이나 병마로부터 이를 막아 주기를 기원하였다.

마을에서는 이곳에 음식물을 차리고 제(祭)를 지내며 법수가 퇴락하기 전에 새로운 법수를 만들어 세웠다. 그러나 돌림병(전염병)이나 또는

어떤 불의의 사건이 발생 하였을 때 마을을 지키지 못하였다 해서 벅수(멍청이 바보로 비유)로 이름지어졌고 우리가 흔히 사람이 미련하고

 바보스러우면 이 사람을 '벅수'라고 놀림을 주기도 한다.

솟대는 긴 장대 나무 위에 기러기 또는 오리가 있는데 이는 태양신의 사자로 죽은 영혼을 기러기가 하늘로 인도한다고 하는 믿음에서 유래

하였다. 오리는 물에서 사는 짐승으로 농경 사회에서 물의 부족함이 없이 해마다 풍년이 들기를(오리는 알을 많이 낳았던 데서 유래함) 기원

하고 화재 예방을 기원하고 다른 한편으로 멀리서 잘 보여 이정표 역할도 하였다.






낙안읍성의 전통가옥체험장이 있다.







낙안읍성 성문을 들어서면 잠시 타임 머신을 타고 옛날 조선조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계절 따라 피어나는 꽃향기가 진동하고 그 숲이 그리워 떠나지 못하고 둥지 틀어 노래하는

소리 귓가에 맴돈다. 잘 보존된 토속적인 분위기와 민속 경관을 누구라도 한껏 느낄 수 있다. 비록 내가 태어난 고장은 아니지만 마음속의

 고향으로 포근히 다가옴을 느끼게 되는 것은 역시 초가집과 함께 꼬불꼬불 미로 같은 돌담길과 싸리 울타리가 둘러 처진 텃밭들이 아닌가

 한다.

 



이곳은 낙안읍성의 민속민박집이 있다.

주말을 이용하여 민속집에서 하루정도 쉬었다가 가면 좋을 것이다.







낙안읍성의 민속마을을 배경으로 한 컷을 담아보기도 한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넓은 평야지에 축조된 성곽으로 성내에는 관아와 100여 채의 초가가 돌담과 싸리문에 가려 소담스레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도 하다.






시인과 화가의 집도 있다.

그리 높지 않고 모나지도 않아 예전엔 담 너머로 이웃집과 음식을 넘겨 나누어 먹고 또한 동네 꼬마 애들이 골목길 가득히 술래잡기로 해지는

 줄도 모르고 누렁이와 검둥개가 함께 뛰어 놀며 우리가 자라고 우리 모두가 걸었던 정든 고샅향 길이 추억처럼 펼쳐진다.






읍성안 동내, 남내 마을 하단(남쪽)에 위치한 곳에 낮은 우물들이 있고 여기에서 흘러내린 물들이 주변에 모여 못을 이루는데

 이곳을 연지라 한다. 지금은 미나리꽝이 형성되어 있어 미나리가 파랗게 자라고 있으며 2000년 연지를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곳은 옥사(獄舍) 주변으로서 죄수들의 탈주를 막는데도 이 못이 장애물로 이용되지 않았는가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성내에서 사용한 생활 용수가 연지를 거쳐 정화된 다음 수구를 통하여 성밖으로 빠지도록 하였다. (미나리나 연꽃은 오수를 정화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한다.)






옛 초가잡의 앞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가기도 한다.






성곽의 배경으로 한 컷을 담아보기도 한다.

성곽의 길이는 1,410m, 높이 4∼5m, 넓이 2∼3m로서 면적 41,018평으로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호환(虎患)이 잦아 폐쇄하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동문은 낙풍루(樂豊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또는 진남루(鎭南樓)라고 하고

 서문은 낙추문(樂秋門)으로서 성문 정면으로 ㄷ자형 옹성(瓮城)이 성문을 외워 감싸고 있다. 여장엔 활을 쏠 수 있도록 사방 1尺정도의

총안(銃眼)=사구(射口)가 있고 이 총안 역시 근총(近銃)과 원총(遠銃)으로 나누어 있다. 또 여장이 타구(朶口)로 나뉘어 있고 성곽을 따라

가면凸 형의 성곽이 있는데 이는 치성(雉城)이라고 한다. 당초 6곳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4곳만 남아 있다. (일부 복원함) 이 치성은 초소

(망루) 역할을 했던 곳으로 좌우로 침입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축조되었다.







아무리 이렇게 작은 집이라도 집안이 바로 들어다 보이지 않도록 사립문을 달아 차폐를 하였으며 가옥 구조는 남부 지방의

전형적인 일자형 가옥으로 방과 마루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에는 도예방이 있기도 하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동문을 비롯 서,남문을 통해 성안에 들어서면 사극 촬영장이 아닌가하는 착각에 빠져들며 용인,제주민속마을 같이 전시용이나 안동하회마을과

 같이 양반마을도 아닌 그저 대다수의 우리 서민들이 살아왔던 옛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대개의 집들이 죽담(흙담)으로 쌓여 있고 집이 낮고 방문이 작게 만들어 진 것이 특징이다.

큰 부자보다는 관에 출입하는 아전들이나 가난한 서민들이 주로 살지 않았나 추측이 된다고 한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에서 친구와 둘이서 한 컷을 담아보기도 한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순천시가지에서 서쪽22㎞거리의 읍성민속마을은 6만8천여평으로 초가는 초라한 느낌마저 들지만

조상들의 체취가 물씬 풍겨 친근한 정감이 넘치기도 한다.






고목의 앙상한 나뭇가지만 쓸쓸하게 남아있기도 하다.






옛날의 소달구지가 낙읍읍성의 민속마을에 조형물로 등장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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