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나와 골프이야기 ♣/나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및 우리 가문의 내력

 나의 이야기를 소개 올리고자 한다.

 

 

(시조 고려중윤공 성 인자 보자 지묘)

 

 

 

나는 창녕성씨 "시조공 성인보" 할아버지의 26세손으로 경남 창녕군 대지면 에서 태어나 지금은 대구에서

거주하고 있다

 

 

평상시에도 등산과 사진으로 취미활동과 여가를 즐기면서 그 아름다운 추억을 고이 간직 하고자 이렇게 블로그를

만들어서 시간 가는줄 모르고 추억거리를 담아보고 있다.

 

종교는 불교를 믿고 있으며. 그래서 전국의 유명사찰을 많이 탐방 하기도 한다.

 

 

 

 

 

 

 

시조공 묘사 지내기 전에 모습

 

 

 

 

 

 

시조공 묘사 지내는 모습

매년 음력으로 10월 초하루가 되면 전국적으로 많은 자손들이 약 400명정도 참석하여 성황리에 이루어진다.

 

 

 

 

많은 자손들이 묘사를 지내는 모습

 

 

 

 

 

 

 

그러면 지금부터 아래로 나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한다. 

  

 

먼저 나의 시조 및 가문의 내력 부터 소개 올리도록 한다.

 

 


창녕성씨 (昌寧成氏) 시조
 

  • 창녕성씨 시조 : 성인보 (成仁輔)
 
  • 시조의 유래
창녕성씨(昌寧成氏)는 고려때 향직의 우두머리인 호장 중윤을 역임한 성인보(成仁輔)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명종때 사람으로 고종때 창성(創姓)한 것으로 전하며 창녕읍에서 서북쪽으로 15리쯤 떨어진 대지면 모산리 맥산에 위치한 그의 묘(墓)에 대한 일화가 아래와 같이 전한다.

 
창녕성씨 (昌寧成氏) 유래
 
성(成)씨는 원래 중국 성(姓)씨로 주나라 문왕의 일곱째 아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 자손이 나라 이름인 성(成에 읍변이 붙은 것)을 성씨로 삼았으나 초나라 에게 나라가 망하자 읍변을 떼어버리고 成씨라고 하였다.

그후 당나라 때에 학사 성경이가 우리나라로 건너왔고 백제에는 성충, 신라에는 성저라는 사람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의 성씨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고증 할수 없다.
우리 성(成)씨의 본관 즉 관향은 창녕(昌寧)이다. 관향의 유래를보면 성(姓)이 없던 시기에는 그사람 의 출신지를 이름앞에 넣어 신분의 표시로서 성(姓) 의 구실을 했었다. 시조 성인보의 아버지는 성숙생으로 신라 대관성저의 후예라고 한다. 성인보는 창녕에서 대대로 살아온 선비이며 창녕 에서 호장윤을 지냈다.
삼국 말기에는 호걸이 각주군에 할거하고 있어 고려 태조는 관원을 파견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 는데 당시 장민자를 호장이라 하고 장병자는 장교라고 하였다 한다.
그 후손들도 창녕에 정착세거 함으로서 창녕을 본관으로 삼았다.
묘소는 창녕군 대지면 맥산에 있고 향사일은 음력 10월 1일이다. 

 

(2世)  (3世)  (4世)  (5世)
어느해 정월초 인보는 송경에서 지방관리의 하례(賀禮)모임이 있어 그곳에 갔다가 병사하자 문하시중으로 있던 그의 아들(2世) 송국(松國)은 아버지의 시신을 등에엎고 울며 천리길 고향 창녕으로 내려오다가 청산원(고암면 어은에 위치한 주막)에 이르러 해가 기울었다. 지친몸으로 깜박 잠이 들었다가 보니 아침이 되었고, 밤사이 많은 눈이 내렸는데 시신의 주위에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져 있어 발자국을 따라 쫓아가보니 지금의 묘자리 에 이르러 그쳐 있었다.
신통한 것은 온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혀 있었는데도 묘자리 넓이만큼은 눈이 녹아있어 그자리에 묘를 쓰게 되었다.
그후 창녕성씨는 시조의 손자(3世) 공필(公弼), 한필(漢弼)대에서 크게 두계통으로 갈라져서 6세에 내려와 기(紀)를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를 포함하여 13파로 분파되어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의 현손 여완(汝完)이 우왕때 정당문학으로 창녕부원근에 봉해졌으나, 1392년 충신 정몽주가 살해되자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졌음을 알고 포천의 왕방산 아래에 은둔하고 스스로 왕방거사로 불렀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이태조는 원로라 하여 벼슬과 품계를 내렸으나 끝내 사양하며 아들 석린(石璘)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임금을 잘 섬겨라. 나는 왕씨의 신하이니 두임금을 섬길수 없다"하며 절의를 지켰다.
이성계와 옛친구로서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웠던 석린(石璘)은 태종때 좌명삼등 공신으로 창녕부원군에 진봉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석린의 아우 석용(石瑢 : 대제학을 역임), 석연(石王因 : 대사헌. 우정승. 호조판서를 역임), 석번(石王番 : 낭장을 역임)등도 크게 현달하여 이들이 조선초기에 명문의 기틀을 마련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대제학 석용의 인맥으로는 그의 아들 달생(達生)이 지중추원사를 거쳐 판중추원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승(勝)은 중추원 부사를 거쳐 단종때 의주 목사에 이르렀다. 그후 명나라 사신의 송별연이 창덕궁에서 개최될때 도총관 유응부와 함께 운검을 쥐게되는 기회에 세조를 칼로베고 단종의 복위를 계획했으나 갑자기 운검을 그만두라는 세조의 명으로 거사가 어렵게 되자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가 김질의 밀고로 복위 음모가 발각되어 아들 삼문(三問),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 손자 등과 더불어 죽음을 당했다.
승의 맏아들 삼문은 홍주 노은동 외가에서 태어 났는데, 출생할때 "났느냐"하는 소리가 세번 들렸기 때문에 이름을 삼문(三問)으로 지었다고 한다.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한 삼문은 집현전에서 학사, 수찬 등을 역임하며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서리발같은 절의와 함께 그 공로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자 박팽년, 이개, 하위지, 류성원, 유응부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거사전에 탄로가 나서 아버지 승, 3형제의 동생, 아들 원(元), 맹첨(孟瞻), 맹평(孟平), 맹종(孟終) 4형제와 더불어 모두 극형에 처해졌다.
거사가 탄로나서 세조가 친국을 할때 "내 녹(祿)을 먹고 어찌하여 반역을 꾀했느냐"하니 삼문은 "나으리가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나의집을 적몰하여 따져 보라"고 하였다. 그가 순절한뒤 세조가 그의 집을 적몰하여 보니 세조가 왕위에 오른 을해년 이후의 녹봉을 따로 한방에 쌓아두고 날짜를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한편 창산부원군 사달(士達)의 아들 부(溥)와 승문원 교리 희(熺)의 아들 담수(聃壽)도 절신으로 이름을 떨쳤다. 고려말에 형부총랑을 역임했던 부(溥)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개성의 두문동에 은거하며 수차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고, 삼문과 재종간인 담수(聃壽)는 사육신 사건에 연좌하여 심한 고문끝에 김해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선영이 있는 파주 문두리에 은거하며 일생을 낚시와 독서로 소일했다.
태종때 대사헌과 우정승을 거쳐 형,호조의 판서를 역임했던 석연의 후손으로는 그의 아들 암과 억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암의 아들 3형제중 장남 염조(念祖)는 이조정랑, 도승지, 경창부윤을 거쳐 판한성부사와 지중추원사를 지내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그의 아우 봉조(奉祖)는 세조와 동서지간으로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참찬, 우찬성, 영중추원사를 지내고 창성부원군에 봉해진후 우의정에 올랐다.
염조의 아들 임(任)과 간(侃), 현(俔) 3형제는 학문으로 대성하여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성종때 좌참찬을 거쳐 지중추부사를 역임했던 임(任)은 특히 율시(律詩)에 뛰어났고, 글씨는 촉체(蜀體)에 능하여 해서, 초서, 예서에 일가를 이루어, 그의 글을 얻고자 하는 이가 중국에까지 치달았다.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당세에 문명을 떨쳤던 간(侃)은 누군가가 색다른 책만 갖고 있으면 구해서 통독하여 동료들이 서음(書淫)을 한다고까지 말했고 "내가 능하지 못한 것은 음악뿐" 이라면서 거무고를 배웠으나 서른살에 요절했다. 부자문형(父子文衡)으로 유명했던 현(俔)은 서거정 이후 사가(四家)의 한사람으로 불리는 한문학의 대가이다. 특히 그는 [용재총화]의 저자로도 명망이 높았고, 문학보다 그의 소탈한 그의 성품으로 더욱 추앙을 받았다.
염조의 조카 준(俊)은 연산군때 좌의정으로 영의정 한치영, 우의정 이극균과 함께 연산군의 난정을 바로 잡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영의정이 되었을때 하루는 내연(內宴)이 있어 재상들도 들어갔다. 한참 술이 얼큰할 때 연산군이 요염한 기생을 껴안으니 그자리에서 "노신이 아직 죽지 않았사오니 전하는 결코 이러하지 못합니다"하니 결국 그는 갑자사화때 직산으로 유배되었다가 교살 되었다. 그의 아들 경온(景溫)도 공조정랑에 이르었으나 아버지가 화를입고 자손들까지 남겨두지 않겠다는 연산군의 말을 듣고 "나의 생명을 남의 손에 더럽힐수 없다"고 유언하고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외 선조때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던 세장(世章)과 중종반정에 공을세워 창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랐던 희안(希顔 : 찬의 아들)이 뛰어 났으며, 수침의 아들 혼(渾)은 유학계의 거목으로 문하에서 조헌, 이귀, 정엽등 훌륭한 학자를 배출시켜 더욱 명성을 떨쳤다.
경제기획원 인구조사결과에 의하면 창녕성씨(昌寧成氏)는 남한에 총 38,882가구 163,56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 조사>
집성촌(集姓村) :  충북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   충남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   경북 상주군 내서면 능암리,   경북 상주군 모서면 삼포리, 지산리,   전북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   경남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석리, 창산리


 
시조 묘소 찾아가는 길
시조묘
→ 창녕 I.C 에서 내려와 첫번째 신호등에서 좌회전 하면, 500M쯤에 사거리가 나옴. 다시 좌회전 하여 500M쯤에 점멸신호등에서 한번더 좌회전. 100M지점 신호등에서 직진하여 1Km쯤 가면 대지면사무소가 나옴. 면사무소 바로 뒷산에 시조 묘소가 있으며 산 아래에는 맥산제가 있음.

물개서원 → 시조묘소 뒷편 500M지점

우 황 제
→ 우포늪 표지판을 따라가 장재마을에서 주민에게 문의하면 상세히 알수 있음.


















成松國(二世)
 
官  門下侍中, 一云軍器監    효  행  록

선생의 성은 성씨이고 휘는 송국이며  창녕인으로 중윤 인보의 아드님이시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보양하는 예절에 경애를  극진히 하였다.   중윤공께서 송경으로 정조에 조회하러 가셨다가 병환으로 서거하시자 선생은 슬피울고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여 목숨이 거의 끊기게 되니 보는 자들은 서글퍼하며 낯빛을 고치었다. 발인 할 시기에 미치자 선생은 피눈물을 흘리시며 "수레나 말로 운구할 수도 있지만 지극한 슬픔이 마음에 있으니 나는 마땅히 몸소 시신을 지고가 망극한 심정을 다소나마 펴겠다."하시고는 이에 나무로 가지를 만들어 엷은 판자를 붇인 다음 그 위에 시체를 놓고 하루에 일식경을 걸어 현풍현에 이르르니 창녕의 거택과는 삼십리 거리였다. 이날 장차 집에 돌아가려 하였는데 발정한 뒤에 대설이 크게 내리므로 겨우 청산원에 이르러 사랑에서 가숙하고 시체를 모셨다.
 
밤에 바람과 눈이 또다시 일어나 새벽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쳤다. 아침에 보니 범의 발자국이 시체 옆을 맴돌고 갔는데 눈 위에온 곳은 없고 간 흔적만 있었다. 놀라서 바삐보니 시체에는 이상이 없으므로 인하여 그 발자국을 뒤따라가 보니 시체 밑으로부터 원의 문을 나가 대로를 넘어 서쪽으로 조그마한 산등성이로가 들 가운데에 홀로 있는 산에 그쳤다. 여기는 맥산이라고 하는 산 위인데 범의 발자국이 없어졌다. 발자국이 그친곳은 홀로 쌓인 눈이 이미 녹았는데 넓이가 자리 하나쯤되니 마치 광을 판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산세는 북좌 남향을 하게 되어 있으니 청산원으로부터 이 맥산까지는 불과 이백여보였다. 선생은 더욱 기이하게 생각하여 어버이를 이곳에 안장해야겠다 하고는 인하여 한 가운데에 표를 꽂아놓은 다음 시체를 지고 귀가하여 길일을 택하서 안장하였다.
 
얼마 안되어 자손이 귀현하고 대대로 벼슬하니 사람들은 효감의 소치라고 모두들 말하였다.
 
아! 누가 부모가 없으며 누가 자식이 없겠는가. 그 어찌 주창하는데 호응하지  않으며 그어찌 감동하고 보답하지 않겠는가. 선생이 죽은 사람 섬기기를 생존한 사람과 같이 한 것은 어버이를 사랑하는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무거운 시신을 지고 먼 길을 온 것은 결코 한 힘으로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천리 길을 도보로 걸어 끝내 쓰러지지 않고 고향의 집에까지 온 것은 지성 때문이요, 신명이 도왔기 때문이었다.성횽의 감응은 원래 신과 같으니 옛날 맹종이 대나무 밑에서 울자 댓순이 나오고 왕상이 얼음을깨자 잉어가 튀어나온 따위가 바로 이것이다. 선생께서 반장하실 적에 당초에 만일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청산원에서 유숙하지 않았을 것이고 눈이 쌓이지 않았다면 범의 발자국이 나타날 수가 없으며 눈이 녹지 않았다면 정혈을 보여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마침내 눈을 내려 행상길을 멈추게하고 눈을 쌓아 범위 발자국을 나타내고 눈을 녹여 정혈을 보여 주어서 반드시 선생으로 하여금 이곳에 어버이를 안장하게 하여 그 감응한 내용이 더욱 더 두렸하였다.
 
아! 맹종의 댓순, 왕상의 잉어, 선생의 눈이 모두 한 효자에게 나온 것이니 어찌 기이하지 않겠는가.
 
이에 가장에 실려 있는 선생의 지효를 뽑아내어 그 사실을 기 록하고 인하여 열 개의 그림을 그려 그 자취를 표하며 산원을 세워 제향하고 이 효행록을 만들어 전하는 바이다







 


공필, 한필 (3世)
 
成公弼 (공필) 成漢弼 (한필)
2세 시중공의 장남이고 판도판서(版圖判書)고려때 정3품 벼슬 노상파(路上派)의 파조(派祖)이시다. 2세 시중공의 차남이며 문하찬성(門下贊成)이시다. 고려때 문하성 정2품 벼슬 노하파(路下派)의 파조이다.
벼슬은 봉익대부 판도판서에 추봉되었다. 공의 손자인 尙書 准得의 帳籍을 보면 공의 직함은 典客副令으로 되어있고 공의 증손서인 좌의정 이귀령의 장적을 보면 봉선대부 전객부령으로 되어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공의 품계는 從四品인 봉선대부이고 實職은 전객부령이었음이 틀림없다.

구보에 보면 공의 묘는 창녕에 있다고 하나  어느곳인지 미상이며 장단부의 강북에 성정승동이 있는 바 여기에 공의 묘가 있다고 전해온다.
그러므로 공종 23년 丙戌에 이곳에다가 설단하고 해마다 한번씩 제향을모셨는데  남북이단절됨으로 해서 제향을 지낼 수가 없게되었다.이 때문에 건국후 丙辰年에 다시 우항제 옆에 제단을 설치하고 비를 세웠는데 成公 漢弼의 제단도 같은 곳에 함께 만들었다. 배위는 지씨로 右司諫 桓의 따님이시고  감찰원부의 손녀이시며 令同正 曺植文의 외손이시다. 

 
묘는 실전하였는데 우항제 뒤에다가 설단하였다.

고보에 보면 시중공은 공필 한 아들만 기록되어 있고 한필은 기록되지 않았다.

한필의 후손인 萬庸의 자손이 옛부터 대대로 창녕에 거주했는데 이들을 路下成氏라 칭하였으며 公弼의 후손인 思劑의  자손들도 대대로 창녕에 거주하였는데 이들을 路上成氏라 칭하여 마치 晉나라때 南阮, 北阮의 칭호와 같았다. 이는 한필이 족보에 들지 아니하여 그 후손들이 당초에 시중공의 아드님이란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0
그러므로 姓은 같으나 派는 다르다는 말이 있었으니 이는 창녕에서 옛부터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족보 기록을 보면 시중공이 별세하시고 미처 안장하지 못했는데 산에서 스님이 찾아왔다.
 
諸孤(여러 상주)들은 매우 공경하여 대우하자 스님은 감사해 하면서 "무엇 때문에 아직까지 장례를 모시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여러 상주들은 "장지를 구하지 못해서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 諸孤란 두글자는 곧 형제가 있음을 일컫는 말이니 시중공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路下成氏 각파의 私譜에 모두 漢弼을 시조로 삼고 있으니 諸孤란 말이 이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숙종 12년 丙寅에 합보할 것을 완전히 결의하였는데 구보에 판서공이 시중공의 嫡子라 했으므로 삼가 구보를 의거해서 한필을 공필의 다음에 기록하였다.   

 

군미, 군부, 군백, 군보 (4世)
성군미(君美) 총랑공(摠郞公) 봉상대부판도총랑(奉常大夫版圖摠郞)
성군부(君阜) 시랑공(侍郞公) 관 시랑일운 좌우 위정용중랑장(官 侍郞一云 左右 衛靖勇中郞將) 추봉 광정대부 문하평리(追封 匡靖大夫 門下評理)
성군백(君百) 평리공(評理公)관 광정대부 문하평리(官 匡靖大夫 門下評理)
성군보(君補)   평리공(評理公) 공의 휘는 군보이니 벼슬은 고려 광정대부 문하평리(高麗 匡靖大夫 門下評理) 겸 도평의 사사 판문한서사, 사관수국사이고 세자소보였으며 공이 충렬왕때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병부상서에 이르렀다가 도첨의 문하평리에 올랐다. 공은 도량이 너그럽고 중후하며 쉽게 회로가 외형에 나타나지 않으며 벼슬자리에있으매 직분에 충실하여 청명과 지절로써 간하기를 좋아했으니 고려조의 명신 이었다. 배위는 미상하며 묘는 내외분 모두 실전하였다.











한충, 여완, 준득, 유득, 윤득, 이, 저 (5世)
성한충(漢忠) 판윤공(判尹公)  관 판한성(官 判漢城)
성여완(汝完) 이헌공 혹은 문정공(怡軒公 或은 文靖公)호 이헌 시호 문정(號 怡軒 諡號 文靖)관 첨서밀직 정당문학(官 僉書密直 政堂文學)초휘는 한생(漢生) 또는 한광(漢匡)으로 되어있다. 호는 이헌 또는 송창(松窓)이라고도 하였다.고려 충선왕 원년 기유년에 출생하였으며 충숙왕 복위5년 병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검열에 임명되었다.여러차례 옮겨 군부정랑을 거쳐 양광도를 안념하였고 상의 우승지 형부사 어사중승 전법판사를 지냈으며 해주목사와 충주목사로 나갔다가 첨서밀직에 임명되었다. 공민왕때에 민부상서에 임명되고 우왕 4년 무오년에 정당문학상의에 임명되었으며 공양왕때에 창녕부원군에 봉해졌다.공의 집은 선죽교 옆에 있었는데 포은 정문춘공 몽주선생이 충절을 지키다가 해를 당하던날 공을 방문하던 참이었는데 선죽교에서 살해되었다. 태조 2년 계유년 4월에 공은 송경에 있는 집을 계자인 낭장공에게 주고 마침내 한성남문 밖 한림동에 우거하고 도성안에 들어가지 않았다.태조 4년 을해년 3월에 태조는 고인(故人)으로 대우하여 가마를 보내어 초청하고 경회루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공은 마침내 백의관(白依冠)으로 나아가 배우니 세상에서 서궁 양청포의연(西宮 凉廳布衣宴)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공은 고향에 돌아가 옛 임금을 위할 것을 청하고는 마침내 포천 왕방산에 은둔하였다. 묘덕암을 짓고 삭망이면 묘덕암 뒤 봉우리에 올라가 송악을 바라보고 통곡하였으며 두문불출하고 왕방거사라고 호를 고쳐 왕씨를 잊지 않는 뜻을 표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 봉우리를 이름하여 두문봉이라하고 지금까지 전해내려 온다.이조 초에 기로(耆老)로 보국숭록대부 검교문하시중에 제수되고 창성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공이 처음으로 기로사(耆老社)에 드신 것이다. 그러나 공은 모두 취임하지 않고 은거하였다.태조6년 정월 22일에 별세하시니 향년 89세였다. 조정에서는 쌀과 콩 1백석을 하사하여 예장하게 하고 문정이라 시호 하였으며 불조를 명하였다. 실록에 이르기를 공은 성품이 간결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자손을 법도있게 가르쳤다 하였다. 기동 묘덕암 옛터에 유허비가 있고 안산 암석에 이헌유촉이라 새겨졌으며 외안산에 채미라 새겨졌고 수구에는 창녕성씨 세장수구라 새겨졌으며 묘 입구에는 창녕성씨천이라 새겨졌다.공의 옛집은 송경의 선죽교 옆 십보쯤 되는곳에 있었는데 옛 집터위에 유허비가 있는 바 전면에는 창녕부원군 문정공 성여완 지유허라 썼으며 후면에는 만력 병신(丙申)에 칠대손 유수 수익이 세웠다고 써있다.이 비는 중간에 부러졌는데 경인년에 외손 유수 권상유가 개입(改立)하였다.이름은 여지승랑과 여러 명현록에 실려있다. 순조 8년 무진년에 물계서원에 추봉되었으며 해남군 화산면 오금리에 있는 금성사에 배향되었다. 정조때에 양주 유생들이 상소하여 선절사에 추배할 것을 청했으나 일이 끝내이루어지지 못했다. 배위는 경안 택주 금성라씨로 정순대부 밀직사지신사 천부의 따님이고 동경유수 윤의 손녀이며 금자 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성 좌복사 판호부사로 치사(致仕)한 득황의 증손녀이시며 봉선대부 도진사장 사자금어대 곽운룡의 외손이신데 정종2년 병진년에 별세하셨다.묘는 포천군 신북면 고일리 후동 계좌 합봉이며 각각 표석과 상석이 있고 곡잠과 크고 작은 석인 및 장명등이 있다. 제각에는 묘덕제라 편액하였는데 건국후 경신년에 신축하였다. 불조묘는 창녕군 부곡면 하포리에 있는데 문현사라 편액하였다.
성준득(準得) 동부공(東부公)     관 예문관제학(官 藝文館提學)
성유득(有得) 정승공(政丞公)     관 정승(官 政丞)
성윤득(允得) 부사공(副使公)     관 지신사밀직사(官 知申事密直事)
성   이(履) 시랑공(侍郞公)     관 검교문하시랑 우문관태학사(官 檢校門下侍郞 右文官太學士)
성   저(貯)   전서공(典書公)     관 봉익대부밀직사 선부전서(官 奉翊大夫密直事 選府典書)공의 휘는 저(貯)이니 문과에 급제했고 봉익대부 서부전서겸지도평의사사 지삼사사지밀직사사 우문각제학사관동수국사의 벼슬에 이르렀다.공은 타고난 천품이 순수하고 학업으로써 바탕을 삼아 비록 재상의 지위에 있었지만 오히려 글을 읽고 외우는 데 힘을 썼고 헛된말을 하지 않았고 게을르지 않았으며 행동은 예법에 따라 순응했으며 관홀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나가 정사에 참여했다. 또한 엄숙해서 관기를 바로잡는 뜻은 있었으나 다만, 조정의 권세는 간역한 무리 들에게 돌아가 공은 결연히 물러나와 문생과 옛 동료들과 더불어 경서를 강하고 도를 논하는 것으로 일삼았고 정사의 득실에 간여치 않았다. 배위는 미상하여 묘는 관향효자암동에 있었으나 실전했다.











◈ 성삼문(成三問) [1418∼1456]
설 명

본관 창녕(昌寧). 자 근보(謹甫) ·눌옹(訥翁). 호 매죽헌(梅竹軒). 시호 충문(忠文). 사육신의 한 사람. 1438년(세종 20)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집현전 학사 ·수찬 등을 역임했다. 그 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2년 박팽년(朴彭年) ·신숙주 ·하위지 ·이석정(李石亭) 등과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한글의 창제를 위해 정음청(正音廳)에서 정인지(鄭麟趾) ·최항(崔恒) ·박팽년 ·신숙주 ·강희안(姜希顔) ·이개(李塏) 등과 함께 랴오둥[遼東]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건너가 음운 연구를 겸하여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 그 정확을 기한 끝에 1446년 9월 29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케 했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예방승지(禮房承旨)로서 아버지 승(勝) ·박팽년 등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협의했으나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金綢)이 성사가 안 될 것을 우려하여 이를 밀고, 이개 ·하위지 ·유응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친국(親鞫)을 받고,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車裂)의 극형을 받았다.
이어 아버지 승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극형에 처해졌고,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 세 동생과, 맹첨(孟詹) ·맹년(孟年) ·맹종(孟終)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1676년(숙종 2)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 녹운서원(綠雲書院), 1681년 육신묘(六臣墓)가 있는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외에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 의성의 학산 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의 물계세덕사(勿溪世德祠),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6신과 함께 제향,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집에 《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다.                            

 

 ▶ 성삼문 묘소(문화재자료 제81호) -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소재

 ▶ 성삼문 유허비(문화재자료 제164호) -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소재







◈ 성삼문(成三問) ... "매죽헌 사우"
개 요

충남 연기군 금남면 소재 "매죽헌 사우(문절사)"
지정번호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0호
소 재 지 :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 333번지
시 대 : 조선시대

설 명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전기의 학자 성삼문(成三問)의 위해를 모신 사당으로 문절사는 달전리 부락의 북쪽에 위치하며 사우는 동향하고 있는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맛배지붕 건물이다. 조선태종 18년(1418)에 태어난 학자이며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은 호가 매죽헌으로 단종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세조 2년 참살되었다. 외손 박호가 홍성에서 봉사하던 중 1903년 고종의 어명으로 족후손 성주영이 봉사손이 되어 사우를 건립하고 봉사하였으며, 1967년에 박정희 대통령 친필로 문절사라 현판하였으며 임술이후 도와 군의 보조로 일신개축하는 동시에 환경을 정비하고 그 기념비를 세워 선생의 충의정신과 훈민정음 창제에 숨은 공로를 발양하며 후학을 계도하고 민족정기를 확립코자함은 실로 국운륭창에 크게 기여할것이다. <- 성삼문 영정
   
* 문절사 전경과 내부







◈ 물계서원(勿溪書院)
개 요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소재   소장 : 창녕성씨 종중

설 명

역사에 빛나는 훌륭한 여러 조상을 서원에 모셔서 제사하는 곳이다. 처음에는 창녕군 대지면 왕산에 영효사(影孝祠)로 건립되어 효행으로 드러난 시중공(侍中公) 성송국(成松國)선생을 향사(享祠)하여 온 것이 물계서원(勿溪書院)의 효시(嚆矢)이다. 숙종 38년(1712)에 사당을 맥산의 북쪽 물계위에 건축하였으며 영조 5년(1729)에 많은 선비들이 건의하여 사당(祠堂)을 서원(書院)으로 만든 다음 물계서원(勿溪書院)이라 호칭하였다. 시중선생(侍中先生)을 최상석으로 모시고 있는 이곳은 1989년 11월 기공하여 1995년 5월 복원되었다. 복원된 부지는 4,776평이고 경내 면적은 1,751평이다. 처음에는 시중공을 주향(主享)으로 7선생을 배향(配享) 하였으나 추배(追配)
하여 19선생을 모시게 되었으며 근자 1997년에 독곡공과 가정공을 모시게 되어 21선생이 되었다. 이 서원은 시중공을 주향으로 모시고 매죽당(梅竹堂:성삼문) 선생을 비롯한 7선생이 배향 되었으나 그후 여러번의 추향(追享) 으로 모두 21선생이 배향되었는데 이 서원도 다른 서원과 같이 대원군(大院君)에 의해 1871년(고종 8)에 철훼되었다. 이 서원 자리에는 원정비(院庭碑)가 비각속에 지금도 남아있는데 비의 비문은 판부사 이복원이 지었고 동지중추 조윤형이 썼으며 1790년(정조 14)에 세웠다. 공은 또 경북 영천군 화북면 대천동에 있는 대천사(大川祠)에도 제향되었다. 성시중 효행록(成侍中 孝行錄) 공의 천리 부시(千里負屍) 효행을 기리기 위해 공의 14세손 유촌공(柳村公) 환(환)이 1732년(영조 8)에 발간하였으며, 그후 공의 21세손 인호(麟鎬)가 1900년(고종 37)에 중보 재간 하였고 이 재간본은 4권1책142면이며 내용을 보면 천리부시한 사실과 10효도(孝圖)가 있고 각 효도 마다 찬(讚)과 시(詩)가 있으며 물계 서원에 제향된 선생들의 행장(行狀)과 축문 기타 서원관계 여러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 물계서원 소장 책판
개 요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물계서원에 보관된 성혼(成渾)의 문집책판. 지정번호 : 경남유형문화재 제266호
지정연도 : 1990년 1월 16일
소장 : 창녕성씨 대종회
소재지 : 경남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504
시대 : 조선시대
크기 : 가로 22cm, 세로 49cm
분류 : 전적류(기타)

설 명

1990년 1월 16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66호로 지정되었다. 가로 22cm, 세로 49cm로 성리학의 대가인 우계(牛溪) 성혼의 문집책판으로 284장으로 되어 있다. 우계문집은 원집 6권과 속집 6권으로 1621년(광해군 13)에 성문준(成文濬)·김집(金集)·안방권 등 우계문인들이 《우계집》을 발간하였는데, 이것이 우계집의 원집이었다. 우계속집은 숙종 8년에 공주감영에서 간행되었고 중간본은 1809년(순조 9) 성금주가 원집과 속집을 합쳐서 밀양에서 간행하였는데, 우계원집이 광해군조에 만들어진 탓에 당시 집권당이 꺼려하는 부분은 많이 삭제되었으므로 다시 속집이 나오게 되었다. 이 외에 두문동선생실기책판 33장, 창녕성씨문행열전책판 70장, 성씨중효행록책판 46장, 창녕성씨만력보책판 22장, 창녕성씨기축보책판 189장 등 조선시대 목판 총 360장이 부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책판들은 창녕성씨 관계 문적을 새긴 것인데 우계 성혼을 모셨던 물계서원에 보관해 있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물계서원이 훼철됨에 따라 맥산재로 옮겨 보관하였다. 1989∼1984년 물계서원을 복원하고 1996년 11월 9일 서원의 경내 책판고를 복원하여 책판을 다시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 항일투사 성기운(成璣運)
개 요

충남 연기군 금남면 소재 "병산사" 소 재 지 :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
시 대 : 한말시대
병산사는 한말의 항일의사 성기운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우이다.
설 명

선생의 본관은 창녕 (昌寧)이며 휘는 기운(璣運)이요. 자는 순재 (舜在)이고 호는 덕천(德泉)으로 대제학 회곡 성 석용(大提學 檜谷 成 石瑢)선생의 17세 손이며 동주 성 제완(東洲 成 梯完)선생의 후예 이다. 선생은 1877년 (고종 14년) 11월 13일 청도 이서면 신촌동 신안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풍모가 청수하고 전성이 총명하여 나이 8세에 이미 시를 지어 그 학문에 어른들이 감탄하였고 13세때 향시 (鄕試)에서 문장은 낭철하고 응대 동작이 의면해서 만장의 칭송을 받았다 한다. 성장하여 한말의 대유학자 간재 전 우(艮齋 田 愚)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생은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고을은 물론 전국적인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고종의 국상 때 상경 하였는데 정부고관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알고 벼슬길에 오르라고 간곡히 권유하고 추천하나 이를 거부하고 사양하다 지쳐 급급히 귀향하였다 한다. 1904년 (고종 41년)부터 일본이 내정간섭을 시작하여 오다 급기야 통감부(統濫部)를 설치하여 주권을 유린하며 오다. 드디어 한일합방을 감행하고 일본은 무단정치를 시작하면서 조선총독부는 민적령을 전국에 내려 호적을 만들기 시작하자 전국의 유림들은 이를 반대하여 물 끓듯 하였다. 청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반대 하였으나 시일이 흐르고 왜경들의 강압과 회유에 빠저 몇몇 선비들을 제외하고는 초지를 굽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다. 그러나 선생은 호적뿐만 아니라 조세, 부역등 각종 일들을 무시하고 반대 하였다. 이때 일제 경찰이 선생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는데 선생의 운인 손 영석 (孫 永錫)의 노옥일기(虜獄日記)에 의하면 1917년 (丁已) 5월 20일에 청도경찰에서 부장과 수명의 순사들이 들이닦쳐 선생을 연행 하려하자 크게 꾸짖어 말진기를 "내가 대한국민인데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냐"하니 왜경이 말하기를 "무슨 이유로 호적을 하지 않느냐" 고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라는 한국유민 (韓國遺民)인데 왜 너희들 왜적의 호적을 해야하느냐 더구나 나는 우리 한국땅에 살고있는데 너희들의 호적에 들어가야 하느냐"하니 왜경들은 할일없이 돌아갔다. 1917년 (丁已) 5월24일 또 다시 찾아온 왜경에 의해 청도경찰서에 압송되어 구금되었다. 선생은 일체의 식음을 전폐하였다. 다음날인 25일에 순사 수명에 이끌려 사법실에 들어서니 소위 왜인경찰서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노기등등하여 고함을 치며 말하기를 "너는 역적이 아니냐" 선생은 정객하여 말하기를 "나는 내나라 한국을 지키기 위한 것인데 역적이 될수 있느냐. 너희들을 위하는 것이 바로 역적이 되는것이다. 너희들은 천지신명이 굽어 보는것도 두렵지 않으랴"라고 하였다. 그들은 한편 위협하고 한편 회유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마음은 척석같았다. 노끈 그들은 음식 먹기를 권하고 욕설을 퍼붓고 하여도 선생은 끝내 듣지 않았다. 다음날은 선생을 밀실에 불러내어 또 위험하고 달래고 하였으나 선생은 시종일관"나는 대한유민(大韓遺民) 이니 너희들 일본호적을 찰 수 없다"라고 대서 하였다. 이때 선생을 회유하기 위해 내려온 대구도경무부장이 이를 보고 4일동안 이나 한 모금의 물과 한 술의 밥도 먹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의연할 수 있다니 정말 진실한 의사(義士)라고 말하고 석방 하였다. 그 후 6월 11일에 구금되어 15일에 석방되고 7월 3일 구금되어 15일에 석방되고 6월19일 대구 경찰에서 내려와 모진 고문과 설유를 하였으나 끝내 불응하니 또다시 총독부 고관이 내려와 설유와 협박을 해도 선생은 태연히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고 너희들은 불구대천의 원수인데 어찌 너희들 호적으로 고칠수 있겠는가. 나는 대한유민(大韓遺民)이다" 하고 크게 꾸짖었다 하며 , 또한 일본 경찰들이 음식을 권하니 선생 은 "원수들인 너희와 말도 하기 싫은데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하며 물도 마시지 않으니 일경들 마저 경한하였다 한다. 일경들의 박해는 계속하여 8월 1일에 구금되어 8월 5일에 석방되고 한것이 20수일이 있다. 이와 같이 갖은 고문을 당하고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 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호적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의사가 다니며 치료하였으나 선생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왜경들은 당황하여 석방 하였는데 경찰서에서 나올때 지팡이를 주니 선생은 너희들 지팡이는 필요없다 하며 꼿꼿이 걸어서 나왔다 한다. 이로부터 배일거두로 지목되어 이지방에서 살지 못하고 유배생활을 하다 선조의 고향인 현 달전리로 이주하게 되자 이곳학도들이 선생의 충의에 감동되어 선생을 따르는 제자가 800명이나 되었다. 선생은 끝내 호적을 고치지 않았을뿐 아니라 이름 위에는 반드시 대한 유민이라고 쓸 만큼 민족 정신이 투철하고 고고한 철의로 일제에 항거 하였다 한다. 그 후 선생은 1953년 충현서원장을 지냈으며, 1956년 8월 5일 80세로 돌아가셨다. 1972년 문인과 고을 유림들이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에 사우(병산사:屛山祠)를 짓고 매년 제 사를 지내고 있으며 그곳에는 선생이 남긴 문집과 목판(木板)이 보관되어 있다.





 

 

 

 

 우리 문중의 산소

김열부와 성효자의 비석을 세우다

 

 

 

 

 

 

 

 

 경남 창녕군 대지면 고향의 마을 입구

 

 

 

 

 

 

고향 마을의 전경이다.나의살던 고향은 꽃피는산골~~   

지금도 여기 고향에는 부모님이 거주 하시는 곳이며 나도 고향을 자주 가는 곳이다.

 

 

 

 

 

 

 

 부모님이 거주 하시는 시골의 포근한 한옥집

명절이나 집안의 행사 시에는 여기에서 집합 장소다. ㅎㅎ

 

 

 

 

 

 

 

 우리 고향 마을의 회관의 전경이다.

 

 

 

 

 

 

 

 우리 고향 마을의 회관을 건립하여 준공식을 가졌다

도비와 군비의 보조지원으로 깔끔하게 동회관이 건립되어 시골의 경노당으로도 사용을 한다.

 

 

 

 

 

 

 

 

 동회관 준공식 날 오픈식을 가졌다

김충식 창녕군수님,성이경 군의장, 구자천 군부의장 (현재 창녕군의장),도의원을 비롯한 창녕군청 과장님등 많은 내외 귀빈을 모시고

성황리에 준공식을 마쳤다.

 

 

 

 

 

 

 

 나의 어릭적 초등학교의 모습 (대지초등학교)

지금은 옛날의 모습은 사라지고 현대식 건물로 신축이 되었다

시골에서 편도 4km 왕복 8km를 6년간 비가오나 눈이오나 걸어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ㅎㅎ

 

 

 

 

 

 

 

 

 

 

 

 

 

사진은 이러한 장비로서 취미로 즐긴다. ㅎㅎ

 

 

 

나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유일한 친구인  "캐논 5D  Mark ll" 

70-200mm 아빠백통

 

 

 

 

 

 

 

24-70mm 렌즈

 

 

 

 

 

 

 

본인이 70-200mm 아빠백통 망원렌즈로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보는 모습이다.

 

 

 

 

 

 

 

 

 

24-70mm로 거금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보는 모습이다.

 

 

 

 

 

 

 

 

방가방가요 ^**^    방문을 환영합니다.

좋은하루

          가실 때는 아래의 (공감)

버튼을 한 번 꾹 눌러주시면 복 받으실 것입니다. ㅎㅎ

                            아울러 더 많은 분들이 이 글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