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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여행 갤러리 ♣/부산,경상남도

남해의 선구마을과 몽돌해변

선구마을

남해군 남면 선구(仙區)마을

선구마을은 전통 민속 문화와 전쟁역사가 배어 있는 산실
바다 건너 여수 돌산도가 마주 보이는 아늑한 포구에 자리 잡고 있는 선구마을은 일년 내내 봄날과 같다.

뒷산은 선녀가 하강하여 가야금을 타는 형국을 닮았다 하는데 물부리산이라 부른다. 옛날부터 포구에 배가 많이 드나들어 선구(船九)라 부르기도 했고 마을에 잣나무가 무성하여 백림(栢林)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3백 여 년 전에 마을명의 한자음이 선구(仙區)로 바뀌게 되었다. 이유인 즉 마을 뒤 옥녀봉에 옥녀가 하강하여 놀다가 승천하고 백림에서 신선이 놀았다고 하여 선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 하나의 전설은 감찰선생이란 분이 마을을 지나다가 노숙하게 되었는데 모기가 극성을 부려서 모기 입에 부적을 붙여 쫓았기 때문에 지금도 마을에는 모기가 적다고 한다.

파도가 몽돌을 씻어주며 노래하고 해안과 접해 있는 마을 주택들은 비탈 진 언덕배기 위에 총총히 계단식으로 집이 지어져 바다에서 마을 풍경을 보면 마치 굴 껍데기를 포개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고층건물을 연상케 하는데 집집마다 심어 놓은 정원수 덕분인지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마을이다. 일백여가구에 160여 명이 살고 있는 주민들은 밭에서 마늘과 고구마 등을 생산하고 어민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많지도 않는 전답과 크지도 않는 어장에서 그나마 약간의 수입으로 근면과 성실로 험악한 세상을 헤쳐 나가고 있지만, 인심만은 풍성하다.


그러나 주민들은 아무런 불평 없다. 욕심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삶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마을에는 전통문화와 뼈아픈 전쟁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데 하나는 조상으로부터 물러 받은 전통 민속 문화를 보존하고 전승하여 후대에 길이 남기고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만들어진 석굴이다. 인위적으로 만든 석굴의 노동자가 곧 우리의 조상들이며 전쟁의 피해자들이기에 뼈아픈 과거를 알리기 위해 8개의 석굴이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길 주민들은 바라고 있다.

경남도무형문화제 제26호 선구줄끗기 전승에 총력을···
조상들이 생활의 뿌리를 내리고 민간신앙이자 전통 민속놀이를 남긴 우리 고유의 전통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데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따라 계승할 수도 있고 소멸되기도 한다. 남해를 대표할 수 있는 민속놀이의 전승을 위해 선구 주민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모든 일에 손을 놓고 단 하루만이라도 한해의 풍농과 풍어를 기원하는 줄끗기 민속놀이에 온갖 정성을 쏟아 붓는다.


매년 정월대보름이 되면 보존회(보존회장 정군삼. 예능보유자 김찬중)에서는 조상으로부터 계승되어 온 전통 민속행사를 마을 위쪽 능선에 있는 할배 당산나무과 해안가에 있는 할매 당산나무에서 각각 당산제를 모시고 줄끗기를 하는데 마을 앞 1km에 달하는 타원형 해안 몽돌 밭이 놀이장이다. 이웃마을 지원군과 함께 신명나게 한바탕 줄끗기와 달집태우기를 하면서 한해의 액을 모두 날려 보내고 한해의 풍년을 기원한다.


마을 주민들은 정월 대보름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면서 설날 전부터 준비를 하는데 마냥 어린애들처럼 기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보존회 측은 소품들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제물준비와 동네잔치에 정성을 모으고 있는데 인심이 천심이란 말이 있듯이 지극한 정성을 들이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을에 어떠한 일이 닥쳐도 이겨나갈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마을은 부촌인 것 같지 않지만 마음만은 부촌인 것은 틀림이 없다. 나는 15년 동안 줄끗기 발굴과 계승 지도를 위해 줄곧 이 마을과 인연을 가졌기에 이 마을 주민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긴 세월동안 마을 사람들을 묵묵히 지켜보았지만 민족혼이 살아 있는 민속 문화를 위해 일심동체 될 뿐 아니라 마을 발전을 위해 한마음 한 뜻이 되는 마을이라고 칭찬과 자랑을 하고픈 곳이다.
나는 말하고 싶다. 위대한 한민족의 저력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마음이 합해지는 이 순간이라고 크게 고함을 치고 싶다. 환한 웃음이 계속되길 바라며 전수관도 건립된다고 하니 기쁜 날들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민족혼 말살을 위해 일본군이 만든 석굴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혼과 전통 민속을 말살하기 위해 일본군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떤 행동도 자행하였다. 선구마을은 평온하였고 마을명과 같이 신선과 선녀가 노닐던 곳으로 아름다운 포구가 있어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풍요로운 삶을 유지했던 곳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군에 의해 남면 해안 일대는 전쟁의 주둔지로 만들어졌고 절경인 선구 해안에 곡사포를 은폐하여 발포 할 수 있는 8개의 석굴이 만들어 지는데 석굴 내부에 광장을 만들어 무기들을 저장하고 서로 왕래하는 통로를 만들려는 엄청난 계획이었다.


나는 이러한 사건을 확인하기 위해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김희영 개발위원장과 같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석굴을 확인하였다.
김희영 개발위원장은 석굴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 해주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이 근로보국대란 기치를 세우고 선구 해안을 요새화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을 강제동원해서 24시간 쉬지 않고 징, 망치, 곡괭이 등으로 옥수수, 콩깨묵 등 잡곡을 먹이면서 1941년에 석굴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목적은 연합국의 군인들이 여수를 기습하고 상륙작전을 펼친다는 소문에 여수를 봉쇄하기 위해서 반대편인 선구에 포 부대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하자 석굴 요새화도 중단되었던 것이다.


 

 

 몽돌해변과 선구마을의 풍경

 

 

 

 

몽돌해변의 저 뒤로는 향촌 몽돌해변이 보인다

 

 

 

 

 

선구마을의 작은 선착장에도 나룻배는 평온하기만 하다.

 

 

 

 

 선구마을의 입구다.

 

 

 

 

 선구마을의 시골 풍경이다.

 

 

 

 

 

 

 

선구마을의 입구로 들어선다.

 

 

 

 

 

 선구마을에는 옛 시골의 돌담길이 이색적이다.

 

 

 

 

소박한 시골 마을의 어촌에도 자연은 그대로이다.

 

 

 

 

 

시골마을에는 아직도 돌담길이 곳곳에 보이기도 한다.

 

 

 

 

 

이제 향촌 몽돌해변으로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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