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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골프이야기 ♣/창녕성씨 문중행사

{경남 창녕군} 나의 시조 중윤공 諱인보(成仁輔)할아버지의 6세인 고려충신 정절공 성사제 선생 신도비각

나의 시조 중윤공 諱인보(成仁輔)할아버지의 

6세인 고려충신 정절공 성사제  선생 신도비각

 

 나의 시조 중윤공 諱인보(成仁輔)할아버지의 6세인 고려충신 정절공 성사제 선생의

公은 판서공 공필의 증손이며 광록대부 삼중대광(三重大匡)좌정승 휘 유득의 아들로 일찍이 학문을 성취 하였으며 고려 공민왕때 제과에 급제한후 보문각 직제학을 20여년 근무 하였으나 조정이 극도로 문란함을 탄하고 10여년간 은둔생활을 하셨다. 이태조가 개국하자 王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李가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하시었다. 처자에게 이르기를 나는 대대로 국은을 받았는데 살아서는 국가에 보답하지 못하였고 죽어서는 망국대부가 됨을 면할수 없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선조를 뵙겠는가 내가 죽더라도 시신마저 거두지 말라 하시고 처자를 창녕으로 보내셨다.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가 경덕전에 과거를 베풀고 명류들을 초유 하였으나 관을 벗어 나무에 걸고 고개를 넘어 피하며(이고개를 부조현이라 칭함) 두문동에서 끝까지 충절을 지키셨다. 충절을 지킨 분들이 72人으로 세칭 두문동 72賢이라 칭한다. 이조 영조16년에 왕은 “고려충신부조현”이란 글을 돌에 새겨 표시케 하고 영조27년 두문동에 비를 세웠다.


公은 표절사(表節祠)에 배향되었고 고종9년에 정절(貞節)이라 시호(諡號)가 내렸으며 창녕 물계서원에 추향 되었다.
우리 성문은 고려말의 성사제, 성부(두문동72현중 한분)의 충신과 조선조의 사육신 성삼문, 생육신의 성담수등 충효전가(忠孝傳家)한 가문이다

 

▶소재지 :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석리 729-5 

 

사진촬영정보

삼성갤럭시 22울트라(1800만화소)

 

 

고려충신 정절공 성사제선생신도비각 이라고 새겨져 있다.

 

 

 

 성사제 선생의 신도비각이다.

비와 비각은 1809년 3월에 창녕읍 조산리 산10-1번지에 있었으나 

1930년 물계서원 근처인 모산리 271번지에 이건되었다. 이건된 자리도 고속도로 개통과 비각의 노후화로 인해 2002년 현재의 자리로 이건되었다.

 

 

 

 

정절공 성사제선생 신도비 이수기에 대한 설명의 글이다.

 

 

 

창녕 성사제 신도비에 대한 설명의 글이다.

 

 

 

고려충신 성사제 신도비는 경남문화재 제 24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충신 성사제 신도비는 고려말의 충신인 성사제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비석이다. 

비각은 정면 측면 모두 1칸 규모이며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공포는 3익\n공 형식이며 단청을 하여 마감하였다. 

 

 

 

비각 정면에는

고려충신보문각직제학정절공성선생신도비각 이라고 새겨져 있다.

 

 

 

성사제 선생의 비문의 글이다.
비석의 부좌(趺坐)는 방부형(方趺型)이며 개석은 옥개석이다. 비신(碑身)의 규모는 높이 195㎝, 너비84㎝, 두께 3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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